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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보다/책

알베르 카뮈, 사형에 대해 썰을 풀다

:차차 2013. 4. 26.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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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기회도 남겨주지 않았다

알베르 카뮈, <단두대에 대한 성찰,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알베르 카뮈, 출처: 다음 인물지식 


“14세의 어린 소녀를 살해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버턴 애벗이 어제인 1957년 3월 15일에 캘리포니아에서 처형되었다. 이런 범행이야말로 바로 범인을 교화할 수 없는 자들로 분류하게 만드는 잔혹한 범죄라고 생각된다. 애벗은 여전히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했으나 사형을 당했다. 집행은 3월 15일 10시로 정해져 있었다. 9시 10분에는 변호인단이 마지막 상소문을 제출할 수 있도록 집행 유예가 허용되었다 11시에 상소가 기각되었다. 11시 15분에 애벗이 가스실로 들어갔다. 그는 11시 18분에 첫 가스를 들이마셨다. 11시 20분에 특사 위원회의 비서가 전화를 걸어왔다. 위원회의 의견이 바뀌었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바닷가로 휴가를 떠난 주지사를 찾아 나섰고 이어서 형무소로 직접 전화를 했다. 애벗이 가스실에서 끌려 나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만약 어제 날씨가 나빠서 캘리포니아 하늘에 비바람이 몰아치기라도 했더라면 주지사는 바다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가 2분 더 빨리 전화를 했을 것이고 오늘 애벗은 살아서 아마도 자신의 무죄가 증명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아무리 가혹한 벌이라 하더라도 다른 형벌에 처해졌다면 그에게는 그런 기회가 남겨졌을 것이다. 사형 제도는 그에게 아무런 기회도 남겨주지 않았다.”

- 알베르 카뮈, <단두대에 대한 성찰,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소설 <이방인>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카뮈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인권 운동과 사형 반대 운동에 매진했다. 그 과정에서 사형반대협회 설립자 아서 쾨슬러와 공저로 위 <단두대에 대한 성찰> 에세이를 발표하는데, 이를 통해 그는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카뮈에 따르면, 사형수는 실제 사형 집행 이전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간을 겪어야 한다. 언제 자신의 생명이 사라질지 모르는 두려움, 잠시 다녀갔던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사면될 수도 있을까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다시 찾아오는 무력함과 좌절 사이에서 황폐화된다. 생명체에게 가장 잔혹한 형벌은, 생명을 잃는 것이다. 사형이라는 숙명적인 결말은 당사자로부터 희망을 앗아간다. 19세기에 활약했던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백치>라는 소설에서 미슈킨 대공의 입을 빌려 이러한 실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목이 잘리고 나서도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몸통만이 저 혼자 달려가거나 애원하는 예가 있으니까요. 반면에 수형자에게 숙명적인 결말의 확신을 준다면 이건 바로 그 희망을 빼앗아가는 것이 됩니다. 죽음을 열 배나 더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그 희망을 말입니다. 일단 판결이 내려지고 나면 거기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에 더 이상 끔찍한 것은 없다 싶을 정도로 견디지 못할 고문이 되는 겁니다.”


최근에 실시된 어느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 대학생 76%가 사형제도에 찬성했다고 한다.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가 주된 이유였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 카뮈는 사회 스스로가 사형제가 주는 경각심과 본보기적인 성격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사회가 사형제도를 통해 정말 경각심을 심어주고 싶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TV 등을 통해 처형 장면을 많은 이들에게 공개하고 사형을 당하면 신체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적어서 사람들이 보게 했어야 한다고. 그는 “야밤에 형무소 안마당에서 슬그머니 범하는 살인행위가 어찌 본보기가 될 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1886년까지 영국 브리스틀 감옥에 입감된 167명의 사형수 중에서 164명이 공개처형을 구경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로 사형제의 무효과성을 입증한다. 범죄의 유무는 사형제의 존폐 자체와는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카뮈는 이러한 반박에서 나아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는 사회가 절대적인 악을 규정하고, 그에 대한 형벌로 사형을 구형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어쨌든 한 인간이 절대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사회가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오늘날 사회가 그렇다고 믿지 않는다. (중략) 사회는 그 미래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합리화하는 데 습관이 되었고 그 결과 극형을 절대적인 방식으로 행사하는 습관이 되었다. 그때부터 사회는 사회가 지상에서 세우는 계획과 이론을 거스르는 것은 뭐든지 죄악과 신성 모독으로 간주했다. 달리 말하자면 사형 집행인이 신부에서 공무원으로 변한 것이다. 그 결과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역대 정권별 사형집행, 출처: 한국일보



한국에서 사형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악독한 범죄자’ 보다는 독재시절 정부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제거하는 도구로 활발히 사용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급박한’ 국가안보 논리에 의해 단지 며칠 만에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가 그랬고, 역대 독재정권들이 그러했다.


국가와 사회는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으로 선한가? 법적으로 생명을 앗아가는 사형과 그렇지 않은 징역형을 내리는 것 사이에 어떤 명확한 기준이 있는가? 법관들은 그 둘을 명확히 구별할 만큼 완벽한가? 그렇지 않다면, ‘일단 판결이 내려지고 나면 거기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제도와는 이별해야 한다.



* 본 글은 2012년 <인권생각 움> 창간준비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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